2007년 08월 24일
[동방] 그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 시리즈 마지막 마무리 본. 쓰는 내내 마음에 안들어서 그만 둘까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마무리는 내야하니까-하는 느낌으로.
레이무를 처음으로 안았던 그 날의 밤은 청명한 푸른 달이 떴다.
손을 내밀어 옆을 더듬어 보았을 때, 따스한 그녀의 몸이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그녀가 누워있었던 이부자리는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신이 확 깨어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빛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등을 다른 손으로 눌러 진정시키면서 귀를 기울였다. 곳곳의 틈새를 열고 샅샅이 신사 주변을 훑었다. 가느다란 뒷모습이 시야에 잡히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유카리."
레이무는 우물가에 있었다. 평소에 입는 홍백의 무녀복 대신 새하얗고 얇은 유카타 한 장. 방금 목욕을 했는지 뽀얀 살빛이 천 아래로 어른거렸다. 물기를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달빛을 빨아들인다. 그녀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찾아 뛰어온 발자국 소리만을 듣고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고 난 후, 레이무는 좀처럼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 서늘한 침묵을 전신으로 받아들인다. 왠지 모르게 따끔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레이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가─
"어떤 하쿠레이?"
─왠지 모르게 울고 있는 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핥으면서, 유카리는 대답했다.
"유카타를 입은 당신이 좋아."
요괴는 인간을 습격하고,
인간은 요괴를 사냥한다.
일찍이 요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어왔던 인간들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소녀 역시 그 요괴대응책 중의 하나였다. 날 때부터 갖고 있는 특수한 힘. 상대의 심층기억에 파고들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졌던 소녀는 그 이능 덕택에 불온한 존재로 여겨졌었지만, 요괴 사냥을 위한 도구로서 채택됨으로써 그 삶을 영위하는 것을 허가받는다. 설령 물건으로 쓰여져도 괜찮았다. 제대로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나의 존재를 허가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기뻤던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약간의 조치'를 받은 소녀는 요괴의 힘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무기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요괴와 싸웠던 날,
소녀는 요괴를 물리칠 수 없었다.
요괴가 소녀를 해할 수 없듯이, 소녀도 요괴를 해할 수 없었던 것.
요괴와 소녀의 힘은 서로 닿을 수 없다. 그러한 틈새를 벌리는 '조치'를 받아버렸기 때문에.
그렇기에 소녀의 능력은 오로지 인간에게밖에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로지 인간만이 소녀를 해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후의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수했어.'
사쿠야는 후회했다. 이마가 길게 찢어져서 왼쪽 눈을 잔뜩 가리며 펑펑 쏟아져나오는 피를 팔로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시야가 흐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미 마리사와 잔뜩 싸우고 난 후라 가뜩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소녀의 망령이 웃는다.
[언니같은 사람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에에. 동감이에요. 적어도 당신이 '인간'이었을 때에 만났었더라면, 이야기는 훨씬 쉬웠겠지."
사쿠야의 자조섞인 대답에 소녀는 높은 톤의 웃음을 터트렸다. 숲을 길게 진동시키면서 울리는 그 소음이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 속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망령의 주변을 어지럽게 휘감아 돌고 있는 빛의 입자들이 그녀의 기억을 농락한다.
조금만 더 일찍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소녀가 한을 품고 죽어, 오로지 하나만의 목적을 가진 악령으로 거듭나기 전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와서 그녀에게 '인간'이라고 해도, 목적을 토대삼아 존재를 유지하는 망령에게 통할리가 없다.
이 소녀의 망령은 완전히 소멸시켜버리지 않는 한, 계속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진할 것이다.
그래, 환상향의 전 인간의 몰살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완수할 때까지 움직인다.
죽어서, 그렇게 고정되어버린 망령이기에.
정말이지,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되는 동네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는 곳이구나.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 그렇기에 사쿠야는 아직도 환상향이 어렵다.
[언니.]
"?!"
샤악.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사쿠야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나이프로 찔러 낸 상처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피로 잔뜩 미끌미끌해진 시계는 어이없게 바닥으로 떨어져버린다.
"이런."
사쿠야는 자조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망령이 입술을 길게 찢으면서 웃는 것을 보면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복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나이프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사쿠야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나이프가 깊숙히 틀어박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슬펐다.
"곤란...한걸..."
[어째서 웃고 있어?]
"하, 하, 글. 쎄..."
자, 선택을 해라. 사쿠야는 급속도로 식어가는 자신의 몸을 느껴가면서 머리를 급하게 회전시켰다. 지금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주워 시간을 멈추고 회복에 들어가는가. 지금 남은 마력이라면 간신히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회복이 끝나고 시간이 다시 흐르면 그것으로 게임오버. 사쿠야는 마력이 텅 빈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소녀의 공격을 받는다. 아니, 소녀는 어쩌면 사쿠야를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먼저 그녀에게는 할 일이 있으니까.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서 인간을 살해할 것이다.
막기 위한 방법은 하나.
소녀의 망령을 완전히 말살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남은 마력으로 소녀를 없앨 것인가?
"아니..."
사쿠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 아이를 죽일 수 없어.
사쿠야로서는 그녀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래도 너는,
그래도 나는,
─인간이니까.
"후..."
확실히 실수다. 이 아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아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리할 수가 없다. 나도 참, 물러터졌네...
사쿠야는 쓰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무릎이 꺾이면서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 눈 위에 쓰러졌다. 연한 분홍빛으로 삽시간에 물들어 가는 눈더미 위에서 사쿠야는 간신히 손을 뻗어 시계를 움켜쥐었다.
'무녀는... 안돼.'
이 소녀의 능력은, 무녀가 감당하기에는 오히려 힘들다.
그래, 좀 더 생각없고, 저돌적인 바보가 아니면 안되지.
나이프를 들어 허공을 그으면서 사쿠야는 공간을 잘랐다. 그 공간에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담아, 금발의 마법사가 있는 곳을 향해 남은 마력을 모두 짜내어 전송한다.
지잉!
갑작스러운 귀울음에 마리사는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움켜쥐었다. 우웅, 우웅 묵직한 진동과 함께 들려온 것은 사쿠야의 희미한 속삭임이었다. 뭐? 뭐지? 마리사는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면서 사쿠야를 찾았다.
"사쿠야? 어이, 사쿠야 근처에 있는거야?!"
"아니. 없어."
마리사의 말에 대답하며 나오는 것은 사쿠야가 아닌 레이무였다. 그녀 역시 한쪽 손으로 자신의 귀를 직직 문지르면서 마리사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방금 이건 뭐야?"
"그 메이드의 농간이겠지. 자신과 네 주변의 공간을 축소시켜서, 그 작은 목소리가 여기까지 닿게 만든거야. 뭐라고 했는지는 들었지?"
"아? 아아..."
- 뒤를 부탁해. 레이무에게는 비밀로. 마리사에게 맡길께.-
에? 마리사는 사쿠야의 희미한 음성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서 레이무를 쳐다보았다. 레이무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귀를 문지르던 손을 내리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너랑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 아니면 컨트롤 실패라던지. 아쉽게도 나도 들어버렸어."
"아. 응...! 일단 쫓아가보자. 예감이 안 좋아."
"에에. 동감이에요."
레이무는 마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함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마리사 역시 빗자루에 올라타면서 그녀의 뒤를 쫓아 날기 시작했다.
레이무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빗자루에 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날려 마포처럼 쏘아져 나간다. 속도라면 자신이 있는 마리사였지만, 그 기세에 눌려 자꾸 뒤쳐지게 된다. 급선회하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대는 레이무의 상태는 그야말로 무중력.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이동하고 있다. 젠장, 저 녀석. 오늘따라 잽싸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레이무의 몸이 덜컥 멈추더니 아래로 뚝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어?! 야, 레이무?!?!"
끈이 끊어진듯 부자연스러운 그 동작에 마리사가 놀란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하지만 뒤를 잇는 충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착지한 거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마리사는 허겁지겁 레이무가 낙하한 지점을 향해 천천히 고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뭐, 야?"
바닥을 딛고, 마리사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공이 점점 크게 열리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
먼저 도착한 레이무는 그 홍백의 옷을 휘날리며 아무말도 없이,
"..."
침묵해버린 사쿠야의 싸늘한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 사쿠야?! 어이, 괜찮냐?!"
마리사가 사쿠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변의 하얀 눈은 분홍빛으로 넓게 물들어,마치 곱게 쌓인 벚꽃잎 위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마리사가 황급히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차갑다. 오래동안 차가운 눈 위에 누워있어서 낮아진 체온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포가 활동을 중지하고, 전신을 돌던 피가 그 흐름을 멈춤으로서 생기는 싸늘함.
사쿠야는, 죽어버린 것이다.
"뭣?! 거짓말이겠지??? 야! 어이, 사쿠야!!"
"죽었어..."
레이무가 낮은 목소리로 마리사의 행동을 정지시켰다. 레이무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사쿠야가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였다. 바람에 날려 금방이라도 손에서 도망가버릴 듯 휘날리고 있었다. 꽈악,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넣는다.
"...레이무?"
레이무는 손을 뻗어 그것을 마리사의 코 앞에 내밀었다. 마리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차갑게 식은 레이무의 손에 손가락 끝이 맞닿는다. 그것은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사. 사쿠야를 신사로 옮겨줘."
"하, 하지만...!"
"난 녀석을 쫓을께."
"어이. 기다려 봐. 사쿠야 녀석이 이렇게 당했다고. 물론 네 녀석 능력이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체할 수 없어."
레이무가 딱 잘라서 단언했다. 눈은 이미 사쿠야도, 마리사도 보고 있지 않았다. 홀린 듯이 숲 속 저 너머를 응시한다. 이건, 무리겠군. 게다가 확실히 사쿠야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어이, 레이무. 조심─... 벌써 가버렸냐."
저 멀리 붉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리사는 혀를 찼다. 품에 안고 있는 사쿠야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이마를 찡그린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아 다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전만 해도 으르렁거리면서 한바탕 신나게 싸워놓고서는. 장난이지, 안 그래? 마리사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응답이 없다.
그녀의 시간은 완벽하게 멈춰버렸다.
"농담이 아냐!!!"
울컥.
목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억지로 집어삼키면서 마리사가 말을 잘근 씹어 뱉었다. 뱃 속이 텅 비어 쿡쿡 쓰려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마리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사는 사쿠야의 시신을 안아 일으키면서 레이무가 사라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쿠야는 분명히 '레이무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긴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 적이랑 레이무가 대적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겠지. 강하고 어쩌고 간에, 상성이 극도로 나쁘다는 것일 것이다. 사쿠야도 아마 그렇겠지. 사쿠야와 레이무. 두 사람은 그 정체불명의 적과 상성이 나쁘다.
"사쿠야와 레이무의 공통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뭘까. 마리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버렸다. 일단 사쿠야를 신사로 데려다 놓자. 그리고 전속력으로 레이무를 따라잡는 거다. 레이무는 마치 그 놈이 어디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는 듯 했다. 틀림없이 곧 조우하게 된다. 그렇다면 늦장을 부리면 부릴수록 위험하다.
레이무와 적을 단 둘이 대치하게 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겠지?"
대답없는 사쿠야에게 되물으면서 마리사는 빗자루에 올라탔다.
레이무는 '그녀'의 목적을 안다.
그렇기에 '그녀'가 어디로 향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쿠레이의 무녀로서,
이 이변을 처리하기 위해,
"거기 서. 이 민폐덩어리."
레이무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 마을로 이어지는 입구에 버티어 섰다.
[...]
길을 가로막힌 소녀의 망령은 불쾌한 기색을 온 몸에서 발산하면서 레이무를 쳐다보았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힘이 커져 있다. 상대의 기억을 헤집고 흡수하면서 동시에 생기라도 빨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쿠야가 죽은 것은 그저 나이프에 깊게 찔려서였지만. 분명 그러한 공격을 받았으리라. 마리사의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보고 대충 감을 잡았던 일이다.
[당신은, 싫어.]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레이무를 가리켰다. 레이무는 코읏음을 치면서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어쩌라는 거야? 나도 별로 좋지 않아. 너."
레이무는 부적 뭉치를 꺼내들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봐 줄 필요도 없다. 분명 사쿠야는 이 소녀를 가여히 여기다가 당한 것이다. 소멸시키는 데에 망설임이 있었기에 당해버렸다.
"망설임은 없어."
[정말로 없어?]
소녀는 적의를 마음껏 드러내면서 되물었다. 뭐야, 저 자신감은? 레이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코 끝을 찡그렸다. 선문답도 귀찮다. 얼른 정리해버리자. 레이무는 가볍게 걸음을 내딛으면서, 단숨에 망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손을 뻗어 반투명한 소녀의 몸을 붙잡는다. 다른 손에 있는 부적을 내뻗어 왼쪽 가슴으로 쏘아붙였다.
순간 소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그 언니의 복수가 아니지?]
쉬익. 부적은 가슴을 빗겨, 소녀의 왼쪽 팔을 날려버렸다. 빛나는 입자로 산산히 분해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팔을 보면서 레이무는 눈을 크게 흡뜨면서 동작을 멈추었다.
[당신은 무녀니까. 하쿠레이씨.]
그 찰라의 흔들림은, 소녀에게 있어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녀의 팔이 터져 만들어진 입자가 순식간에 레이무의 가늘게 벌어진 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목 깊숙히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불쾌한 감각, 구역질을 삼키면서 레이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간다.
"크윽!!"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밭은 기침을 하는 레이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소녀의 망령이 입을 연다.
[그 언니의 기억에서 당신을 보았어.]
"큭.... 쿨럭....!"
[언니가 당신을 걱정하더라.]
"뭐... 이..."
[하지만 당신은 언니를 걱정하지 않겠지.]
당신은 인간이기 이전에 하쿠레이의 무녀.
그 존재의 가치는 '레이무'에 없다.
[그렇게,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잖아?]
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가.
누구보다도 인간을 위한 존재이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옅어져버린 당신은─
헛점투성이.
죽어도 당신에게 질 생각따위 들지 않는다.
소녀의 미소와 함께, 레이무의 머리 속이 급격하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믹서기에 넣어 낱낱히 갈리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친다. 머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비틀면서, 레이무가 절규했다.
와장창!!
부엌에서 밥을 퍼 나르고 있던 란은 방 안에서 들린 요란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졌다. 재빨리 방안으로 뛰어들면, 엉망이 되어버린 상 앞에 첸이 울상을 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란은 주변을 둘레둘레 쳐다보면서 물었다.
"첸. 유카리님은?"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어디?"
유카리가 떨어트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바닥을 보면서 란이 묻는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도 유카리의 반응이 탐탁치 않았던 것에서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억지로 상 앞에 앉히고 그릇을 하나하나 늘어놓을 때까지도 이 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롭게, 하지만 점점 그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것을 란은 똑똑히 보았다.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란 님...."
"첸. 식사를 하자."
뭐, 대충 짐작은 간다. 란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고생이네."
"...?"
"아─ 아─"
레이무의 목소리가 크게 흔들렸다.
"아────, 하아───!!"
호흡이 막혀 가느다란 비명이 새어나온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그 존재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에까지 기록된다.
이름을 적었던 잡기장, 마주잡았던 손, 시시한 듯 주고받았던 잡담, 모든 것은 결국에는 기억.
지나간 일이 가만히, 고요히 침전되어 가는 것.
그것이 뒤섞인다.
거세게 휘저은 흙탕물처럼, 탁한 침전물들이 몸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하쿠레이의 무녀로서 대를 이어온 '하쿠레이 레이무' 안에,
그 모든 하쿠레이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방대한 기록 속에 휘말려,
'레이무'의 조각은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레이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숲을 울리면서 관통한다.
몸을 지탱해야한다.
이대로라면 흙바닥에 뒹굴어버려.
쓰러지는 몸을 가누어야 하지만,
가누어야 할 몸이 누구의 몸인지 모른다.
수많은 하쿠레이가 얽혀 날뛰고 있는 이 몸은,
누구의 것?
"레이무!"
입술에, 볼에, 부드러운 것이 와닿았다. 눈 앞을 온통 보라빛으로 물들이는 드레스 자락. 순식간에 가득 폐에 들어차는 익숙한 향기에, 일순 발작이 가라앉는다.
"...유..."
쿠웅. 묵직한 돌에 다시 눌리는 감각이 의식을 새까맣게 지워나간다. 손 끝에 닿는 천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이어지는 것은 이름.
단지 몸에서 몸으로,
죽으면 다시 다음으로,
그렇게하여 하쿠레이는 계속하여 축적 되어가고.
그렇다면 이 몸은,
그저 하쿠레이의 기억을 기록하는 데에 쓰이는 일회용의 부속일 뿐인가.
"아아아아아!!!!!!!!"
"레이무!!"
숲이 높아지고, 하늘이 떨어진다. 유카리의 몸과 함께 쓰러진 레이무의 몸은, 그 어느 날에 보았던 것보다도 갸날프다. 그것은 손에 잡히는 실체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레이무의 존재감이 터무니없이 엷었다. 이런 수에 당할만큼 바보같지 않은 아이라고 믿고있었는데. 아니, 믿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단지, 이제 막 열댓살을 먹었을 뿐인 인간 꼬마라는 것을.
"레이무!!!"
유카리는 강하게 레이무를 끌어당겼다. 레이무의 손 끝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손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지만,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엄청난 악력으로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유카리는 그녀를 떼어내어 눈을 맞추었다. 희뿌옇게 흐려진 초점을 억지로 자신에게 끌어들이면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이 정신나간 무녀가...! 얼른 나를 보라고!!"
"하아! 크윽, 뭐라는...!"
효과는 있다. 심하게 떨리고 고양된 어조라고 할지라도, 어찌되었든 평소같이 비꼬인 말투에 레이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그 실낱을 놓치지 않고 유카리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턱을 붙들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자꾸 무너져내리는 몸을 한 손으로 잡아 받치면서 수많은 혼돈에 뒤섞여 있는 레이무를 찾았다.
"진짜 바보네! 일전에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 행패부릴 때는 언제고. 왜 쟤한텐 그렇게 약한데? 그렇게 저 여자애가 좋니?!"
"크, 우윽! 하아아앗!!"
쿨럭, 입에서 한웅큼 터져나오는 액체. 옅은 핏물이 섞여 있을 뿐, 사람의 몸에서라면 보통은 나와서는 안될 무언가들이 튀어나와 유카리의 옷을 짙은 보라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삼킨 빛의 입자는 나오지 않는다. 레이무는 더욱 더 세게 그녀의 옷을 붙잡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단지 괴로워서만은 아닐 것이라고, 유카리는 생각했다.
"유...카리...!"
"그래. 여기있어. 이제 좀 깨어나!"
"나는..."
목이 메어 꼴사나운 목소리로,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레이무는 유카리에게 매달린다.
필사가 되어,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나는, 없어...?"
"..."
"있는 것은... 앞 서서 존재하는 것은... 하쿠레이."
"..."
"사라져도... 다시 나타나...?"
"─────그럴리가 없잖아."
찰싹, 가볍게 볼을 때린다.
"!!"
그 작은 소리가 레이무의 비명을 누르고, 크고 높은 숲 안에 가득 들어찼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정적을 놓치지 않는다. 당연하다. 유카리는 필사를 다한다. 그렇게해서라도, 이 아이를 붙잡고 싶으니까.
"이렇게 큰 이변이 일어났는데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늦장을 부린 것도 당신."
레이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잡아당기면서 유카리가 속삭였다.
"흐르는데로 흘러서, 어느새 모두에게 둘러싸인 것도 당신."
목소리 하나하나에 가득, 담긴 것은 따스함과─ 알아차리기 힘든 애정.
"엉터리의 약속을 일부러지켜가면서까지 마리사를 만나 흠씬 두들겨 팬 것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레이무에게로 빨려들어간다.
"시간을 다한 사쿠야를 보고 화를 내면서 앞뒤도 보지 않고 달려온 것도,"
유카리는 레이무를 껴안아, 자신의 품 속 깊이 끌어당겼다.
"모두가 레이무. 당신일 뿐."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 환상향에서 '레이무'의 존재는 크다.
당신에게 매료되는 인요는 모두 '레이무'에 이끌린 것.
그것을, 어떻게 하면 당신이 알아줄까.
"...유카리..."
"나는 유카타를 입은 레이무가 좋아."
팔에 감긴 레이무의 머리카락에 볼을 부비면서 유카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녀복을 벗은 레이무는, 그야말로 레이무."
"..."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무녀가 아니라, 나만이 독차지할 수 있는 소녀."
"..."
"그래서 좋아."
후우.
작고 가느다란 호흡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조금 촉촉하고 따뜻한 그 숨결에 유카리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표정을 누그러트리면서 레이무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런가..."
레이무의 잔뜩 쉰 목소리가 꺼질듯이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유카리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것?"
"그래."
큭, 하고 막힌 웃음소리가 났다.
"그건..."
"응."
"다행이네."
"그렇네."
완전히 평온하게 가라앉은 레이무의 호흡을 확인하면서, 유카리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레이무의 몸 안에 손을 직접 침투시켜 꺼낸 빛의 입자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손가락으로 짓뭉개 부수어버렸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이네."
유카리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레이무를 안은 채로, 마치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안은 채로 유카리가 멍하니 서 있는 소녀의 형상을 한 악령에게로 빨려들 듯이 달려들었다. 이 공간에 유카리가 침입하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날동안 소녀는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닥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그 요괴가 위험하다는 것은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맞추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커─흑!]
소녀의 형상을 한 악령이 다시 움직인 것은, 부드러운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고 난 후였다.
"안녕. 못 본 사이 많이 변했구나."
소녀는 유카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 '행위'는 그녀가 모르는 채로, 타의에 의해 진행되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녀에 의해 조작된 육체가, 영혼이, 전율한다.
그리하여 이 눈 앞의 존재가,
자신에게 존재의의를 줌과 동시에 빼앗아버린 장본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당신...]
"그런 때도 있었지... 재미있어 보인다고 끼어들었던 것에는 지금 약간 후회해."
꾸드득. 실체가 없는 영혼의 목에서 무엇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허상과 실체의 경계를 없앤 유카리의 손이, 소녀의 목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녀의 몸 속, 일찍이 자신이 심심풀이로 갈라놓았던 요괴와 인간의 경계를 녹여 합쳐감과 동시에 소녀의 숨통을 조른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의 단절이나, 혼의 성불의 관념이 아니다.
존재 자체를 지운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분리시켜 이루고 있던 경계를, 없애버린다.
"당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크....으...]
"조금, 화가 나서 봐주는 것은 없을거야."
[....큭.]
유카리의 금안이 서늘하게 빛을 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줄께."
희미해져가는 소녀의 형상을 보면서 그녀가 고한다.
아아, 그런가. 소녀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 끊어지지 않는 생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소녀는 이미 보이지 않는 입술을 비틀면서 투덜거렸다.
[당신. 진짜 싫어.]
"네, 네."
바깥에서나 여기서나 흔히들 겪는, 사춘기 딸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카리는 소녀의 존재를 말살했다. 경계가 없어진 존재가 주변에 스며들어가면서, 희미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흥."
유카리의 귀가 나빠진 것일지 몰라도,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처럼만 들렸다.
"뭘 감사하는 거야... 끝까지 바보같은 인간이었네."
지쳤다. 극심하게 몰아쳐오는 피로감을 느끼면서 유카리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다. 천하의 야쿠모 유카리의 그런 모습은 돈을 주고도 구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뭐─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자신의 품에 안긴 홍백의 무녀를 쓰다듬었다.
"..."
곧 마리사가 오고, 엉망이 되어 쓰러져있는 이 아이를 발견할 것이다. 죽어버린 홍마관의 메이드는 그 어린 군주가 해결해주겠지.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지만, 그래도 좋았다.
"피곤하네."
마리사의 눈에 띄이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 유카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에 한껏 힘을 주면서 레이무를 끌어당긴다.
"후우."
그전까지는 조금만 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으으... 뭐야. 이거. 쓰면서 이렇게 재미없었던 SS는 처음입니다. 이건 부끄러우니까 토호에 올리지 말아야겠네.
창작에서는 그래도 좀 더 플롯을 다듬은 다음에 글에 들어가는 편이지만, SS같은 경우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런지, '이런 장면을 쓰고싶어!!'라는 생각만으로 글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것도 '레이무가 유카리에게 매달려서 절규하는 모습'을 쓰고 싶어! 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글. 쓰면서 점점 내용 꼬이고 이상해져 가드니 모야, 이게...
에효. 됐어.
맨 처음 도입은 육렝 에로 도입부에 쓰려고 작성해두었던 것인데, 적당히 합쳐봤습니다.
음. 이제 렝육에로를 쓸 차례인가. 이거 진짜 어렵네요... 대체 스토리 어떻게 전개해야할지 짐작도 안가요. 골때리네.
레이무를 처음으로 안았던 그 날의 밤은 청명한 푸른 달이 떴다.
손을 내밀어 옆을 더듬어 보았을 때, 따스한 그녀의 몸이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그녀가 누워있었던 이부자리는 이미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신이 확 깨어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빛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등을 다른 손으로 눌러 진정시키면서 귀를 기울였다. 곳곳의 틈새를 열고 샅샅이 신사 주변을 훑었다. 가느다란 뒷모습이 시야에 잡히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유카리."
레이무는 우물가에 있었다. 평소에 입는 홍백의 무녀복 대신 새하얗고 얇은 유카타 한 장. 방금 목욕을 했는지 뽀얀 살빛이 천 아래로 어른거렸다. 물기를 머금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달빛을 빨아들인다. 그녀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찾아 뛰어온 발자국 소리만을 듣고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고 난 후, 레이무는 좀처럼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그 서늘한 침묵을 전신으로 받아들인다. 왠지 모르게 따끔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레이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가─
"어떤 하쿠레이?"
─왠지 모르게 울고 있는 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핥으면서, 유카리는 대답했다.
"유카타를 입은 당신이 좋아."
-그녀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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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흔
by. 상흔
요괴는 인간을 습격하고,
인간은 요괴를 사냥한다.
일찍이 요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어왔던 인간들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소녀 역시 그 요괴대응책 중의 하나였다. 날 때부터 갖고 있는 특수한 힘. 상대의 심층기억에 파고들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졌던 소녀는 그 이능 덕택에 불온한 존재로 여겨졌었지만, 요괴 사냥을 위한 도구로서 채택됨으로써 그 삶을 영위하는 것을 허가받는다. 설령 물건으로 쓰여져도 괜찮았다. 제대로 먹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나의 존재를 허가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기뻤던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약간의 조치'를 받은 소녀는 요괴의 힘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무기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요괴와 싸웠던 날,
소녀는 요괴를 물리칠 수 없었다.
요괴가 소녀를 해할 수 없듯이, 소녀도 요괴를 해할 수 없었던 것.
요괴와 소녀의 힘은 서로 닿을 수 없다. 그러한 틈새를 벌리는 '조치'를 받아버렸기 때문에.
그렇기에 소녀의 능력은 오로지 인간에게밖에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로지 인간만이 소녀를 해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후의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수했어.'
사쿠야는 후회했다. 이마가 길게 찢어져서 왼쪽 눈을 잔뜩 가리며 펑펑 쏟아져나오는 피를 팔로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시야가 흐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미 마리사와 잔뜩 싸우고 난 후라 가뜩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소녀의 망령이 웃는다.
[언니같은 사람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에에. 동감이에요. 적어도 당신이 '인간'이었을 때에 만났었더라면, 이야기는 훨씬 쉬웠겠지."
사쿠야의 자조섞인 대답에 소녀는 높은 톤의 웃음을 터트렸다. 숲을 길게 진동시키면서 울리는 그 소음이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 속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었다. 망령의 주변을 어지럽게 휘감아 돌고 있는 빛의 입자들이 그녀의 기억을 농락한다.
조금만 더 일찍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소녀가 한을 품고 죽어, 오로지 하나만의 목적을 가진 악령으로 거듭나기 전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제와서 그녀에게 '인간'이라고 해도, 목적을 토대삼아 존재를 유지하는 망령에게 통할리가 없다.
이 소녀의 망령은 완전히 소멸시켜버리지 않는 한, 계속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진할 것이다.
그래, 환상향의 전 인간의 몰살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완수할 때까지 움직인다.
죽어서, 그렇게 고정되어버린 망령이기에.
정말이지, 사쿠야는 입술을 깨물면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되는 동네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나는 곳이구나.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 그렇기에 사쿠야는 아직도 환상향이 어렵다.
[언니.]
"?!"
샤악.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사쿠야가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나이프로 찔러 낸 상처 때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피로 잔뜩 미끌미끌해진 시계는 어이없게 바닥으로 떨어져버린다.
"이런."
사쿠야는 자조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망령이 입술을 길게 찢으면서 웃는 것을 보면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복부를 뚫고 튀어나오는 나이프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사쿠야가 미처 회수하지 못한 나이프가 깊숙히 틀어박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슬펐다.
"곤란...한걸..."
[어째서 웃고 있어?]
"하, 하, 글. 쎄..."
자, 선택을 해라. 사쿠야는 급속도로 식어가는 자신의 몸을 느껴가면서 머리를 급하게 회전시켰다. 지금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주워 시간을 멈추고 회복에 들어가는가. 지금 남은 마력이라면 간신히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회복이 끝나고 시간이 다시 흐르면 그것으로 게임오버. 사쿠야는 마력이 텅 빈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소녀의 공격을 받는다. 아니, 소녀는 어쩌면 사쿠야를 죽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먼저 그녀에게는 할 일이 있으니까.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서 인간을 살해할 것이다.
막기 위한 방법은 하나.
소녀의 망령을 완전히 말살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남은 마력으로 소녀를 없앨 것인가?
"아니..."
사쿠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 아이를 죽일 수 없어.
사쿠야로서는 그녀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래도 너는,
그래도 나는,
─인간이니까.
"후..."
확실히 실수다. 이 아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아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처리할 수가 없다. 나도 참, 물러터졌네...
사쿠야는 쓰게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무릎이 꺾이면서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 눈 위에 쓰러졌다. 연한 분홍빛으로 삽시간에 물들어 가는 눈더미 위에서 사쿠야는 간신히 손을 뻗어 시계를 움켜쥐었다.
'무녀는... 안돼.'
이 소녀의 능력은, 무녀가 감당하기에는 오히려 힘들다.
그래, 좀 더 생각없고, 저돌적인 바보가 아니면 안되지.
나이프를 들어 허공을 그으면서 사쿠야는 공간을 잘랐다. 그 공간에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담아, 금발의 마법사가 있는 곳을 향해 남은 마력을 모두 짜내어 전송한다.
지잉!
갑작스러운 귀울음에 마리사는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움켜쥐었다. 우웅, 우웅 묵직한 진동과 함께 들려온 것은 사쿠야의 희미한 속삭임이었다. 뭐? 뭐지? 마리사는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보면서 사쿠야를 찾았다.
"사쿠야? 어이, 사쿠야 근처에 있는거야?!"
"아니. 없어."
마리사의 말에 대답하며 나오는 것은 사쿠야가 아닌 레이무였다. 그녀 역시 한쪽 손으로 자신의 귀를 직직 문지르면서 마리사 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방금 이건 뭐야?"
"그 메이드의 농간이겠지. 자신과 네 주변의 공간을 축소시켜서, 그 작은 목소리가 여기까지 닿게 만든거야. 뭐라고 했는지는 들었지?"
"아? 아아..."
- 뒤를 부탁해. 레이무에게는 비밀로. 마리사에게 맡길께.-
에? 마리사는 사쿠야의 희미한 음성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서 레이무를 쳐다보았다. 레이무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귀를 문지르던 손을 내리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너랑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 아니면 컨트롤 실패라던지. 아쉽게도 나도 들어버렸어."
"아. 응...! 일단 쫓아가보자. 예감이 안 좋아."
"에에. 동감이에요."
레이무는 마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함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마리사 역시 빗자루에 올라타면서 그녀의 뒤를 쫓아 날기 시작했다.
레이무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빗자루에 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날려 마포처럼 쏘아져 나간다. 속도라면 자신이 있는 마리사였지만, 그 기세에 눌려 자꾸 뒤쳐지게 된다. 급선회하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대는 레이무의 상태는 그야말로 무중력.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이동하고 있다. 젠장, 저 녀석. 오늘따라 잽싸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레이무의 몸이 덜컥 멈추더니 아래로 뚝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어?! 야, 레이무?!?!"
끈이 끊어진듯 부자연스러운 그 동작에 마리사가 놀란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하지만 뒤를 잇는 충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착지한 거라고 생각해도 좋겠지. 마리사는 허겁지겁 레이무가 낙하한 지점을 향해 천천히 고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뭐, 야?"
바닥을 딛고, 마리사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공이 점점 크게 열리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
먼저 도착한 레이무는 그 홍백의 옷을 휘날리며 아무말도 없이,
"..."
침묵해버린 사쿠야의 싸늘한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 사쿠야?! 어이, 괜찮냐?!"
마리사가 사쿠야를 향해 달려들었다. 주변의 하얀 눈은 분홍빛으로 넓게 물들어,마치 곱게 쌓인 벚꽃잎 위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마리사가 황급히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차갑다. 오래동안 차가운 눈 위에 누워있어서 낮아진 체온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포가 활동을 중지하고, 전신을 돌던 피가 그 흐름을 멈춤으로서 생기는 싸늘함.
사쿠야는, 죽어버린 것이다.
"뭣?! 거짓말이겠지??? 야! 어이, 사쿠야!!"
"죽었어..."
레이무가 낮은 목소리로 마리사의 행동을 정지시켰다. 레이무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사쿠야가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였다. 바람에 날려 금방이라도 손에서 도망가버릴 듯 휘날리고 있었다. 꽈악,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넣는다.
"...레이무?"
레이무는 손을 뻗어 그것을 마리사의 코 앞에 내밀었다. 마리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차갑게 식은 레이무의 손에 손가락 끝이 맞닿는다. 그것은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리사. 사쿠야를 신사로 옮겨줘."
"하, 하지만...!"
"난 녀석을 쫓을께."
"어이. 기다려 봐. 사쿠야 녀석이 이렇게 당했다고. 물론 네 녀석 능력이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체할 수 없어."
레이무가 딱 잘라서 단언했다. 눈은 이미 사쿠야도, 마리사도 보고 있지 않았다. 홀린 듯이 숲 속 저 너머를 응시한다. 이건, 무리겠군. 게다가 확실히 사쿠야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어이, 레이무. 조심─... 벌써 가버렸냐."
저 멀리 붉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리사는 혀를 찼다. 품에 안고 있는 사쿠야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이마를 찡그린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아 다시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호흡이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전만 해도 으르렁거리면서 한바탕 신나게 싸워놓고서는. 장난이지, 안 그래? 마리사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응답이 없다.
그녀의 시간은 완벽하게 멈춰버렸다.
"농담이 아냐!!!"
울컥.
목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무언가를 억지로 집어삼키면서 마리사가 말을 잘근 씹어 뱉었다. 뱃 속이 텅 비어 쿡쿡 쓰려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이 마리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사는 사쿠야의 시신을 안아 일으키면서 레이무가 사라진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쿠야는 분명히 '레이무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맡긴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 적이랑 레이무가 대적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겠지. 강하고 어쩌고 간에, 상성이 극도로 나쁘다는 것일 것이다. 사쿠야도 아마 그렇겠지. 사쿠야와 레이무. 두 사람은 그 정체불명의 적과 상성이 나쁘다.
"사쿠야와 레이무의 공통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뭘까. 마리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버렸다. 일단 사쿠야를 신사로 데려다 놓자. 그리고 전속력으로 레이무를 따라잡는 거다. 레이무는 마치 그 놈이 어디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는 듯 했다. 틀림없이 곧 조우하게 된다. 그렇다면 늦장을 부리면 부릴수록 위험하다.
레이무와 적을 단 둘이 대치하게 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겠지?"
대답없는 사쿠야에게 되물으면서 마리사는 빗자루에 올라탔다.
레이무는 '그녀'의 목적을 안다.
그렇기에 '그녀'가 어디로 향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쿠레이의 무녀로서,
이 이변을 처리하기 위해,
"거기 서. 이 민폐덩어리."
레이무는 숲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 마을로 이어지는 입구에 버티어 섰다.
[...]
길을 가로막힌 소녀의 망령은 불쾌한 기색을 온 몸에서 발산하면서 레이무를 쳐다보았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힘이 커져 있다. 상대의 기억을 헤집고 흡수하면서 동시에 생기라도 빨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쿠야가 죽은 것은 그저 나이프에 깊게 찔려서였지만. 분명 그러한 공격을 받았으리라. 마리사의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보고 대충 감을 잡았던 일이다.
[당신은, 싫어.]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레이무를 가리켰다. 레이무는 코읏음을 치면서 한 쪽 눈을 찡그렸다.
"어쩌라는 거야? 나도 별로 좋지 않아. 너."
레이무는 부적 뭉치를 꺼내들었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봐 줄 필요도 없다. 분명 사쿠야는 이 소녀를 가여히 여기다가 당한 것이다. 소멸시키는 데에 망설임이 있었기에 당해버렸다.
"망설임은 없어."
[정말로 없어?]
소녀는 적의를 마음껏 드러내면서 되물었다. 뭐야, 저 자신감은? 레이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코 끝을 찡그렸다. 선문답도 귀찮다. 얼른 정리해버리자. 레이무는 가볍게 걸음을 내딛으면서, 단숨에 망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손을 뻗어 반투명한 소녀의 몸을 붙잡는다. 다른 손에 있는 부적을 내뻗어 왼쪽 가슴으로 쏘아붙였다.
순간 소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그 언니의 복수가 아니지?]
쉬익. 부적은 가슴을 빗겨, 소녀의 왼쪽 팔을 날려버렸다. 빛나는 입자로 산산히 분해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그 팔을 보면서 레이무는 눈을 크게 흡뜨면서 동작을 멈추었다.
[당신은 무녀니까. 하쿠레이씨.]
그 찰라의 흔들림은, 소녀에게 있어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녀의 팔이 터져 만들어진 입자가 순식간에 레이무의 가늘게 벌어진 입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목 깊숙히 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불쾌한 감각, 구역질을 삼키면서 레이무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간다.
"크윽!!"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밭은 기침을 하는 레이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소녀의 망령이 입을 연다.
[그 언니의 기억에서 당신을 보았어.]
"큭.... 쿨럭....!"
[언니가 당신을 걱정하더라.]
"뭐... 이..."
[하지만 당신은 언니를 걱정하지 않겠지.]
당신은 인간이기 이전에 하쿠레이의 무녀.
그 존재의 가치는 '레이무'에 없다.
[그렇게, 당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잖아?]
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가.
누구보다도 인간을 위한 존재이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옅어져버린 당신은─
헛점투성이.
죽어도 당신에게 질 생각따위 들지 않는다.
소녀의 미소와 함께, 레이무의 머리 속이 급격하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믹서기에 넣어 낱낱히 갈리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친다. 머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비틀면서, 레이무가 절규했다.
와장창!!
부엌에서 밥을 퍼 나르고 있던 란은 방 안에서 들린 요란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졌다. 재빨리 방안으로 뛰어들면, 엉망이 되어버린 상 앞에 첸이 울상을 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란은 주변을 둘레둘레 쳐다보면서 물었다.
"첸. 유카리님은?"
"어딘가로 가버렸어요."
"...어디?"
유카리가 떨어트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버린 바닥을 보면서 란이 묻는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도 유카리의 반응이 탐탁치 않았던 것에서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억지로 상 앞에 앉히고 그릇을 하나하나 늘어놓을 때까지도 이 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롭게, 하지만 점점 그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던 것을 란은 똑똑히 보았다.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란 님...."
"첸. 식사를 하자."
뭐, 대충 짐작은 간다. 란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고생이네."
"...?"
"아─ 아─"
레이무의 목소리가 크게 흔들렸다.
"아────, 하아───!!"
호흡이 막혀 가느다란 비명이 새어나온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그 존재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것에까지 기록된다.
이름을 적었던 잡기장, 마주잡았던 손, 시시한 듯 주고받았던 잡담, 모든 것은 결국에는 기억.
지나간 일이 가만히, 고요히 침전되어 가는 것.
그것이 뒤섞인다.
거세게 휘저은 흙탕물처럼, 탁한 침전물들이 몸 안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하쿠레이의 무녀로서 대를 이어온 '하쿠레이 레이무' 안에,
그 모든 하쿠레이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방대한 기록 속에 휘말려,
'레이무'의 조각은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레이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숲을 울리면서 관통한다.
몸을 지탱해야한다.
이대로라면 흙바닥에 뒹굴어버려.
쓰러지는 몸을 가누어야 하지만,
가누어야 할 몸이 누구의 몸인지 모른다.
수많은 하쿠레이가 얽혀 날뛰고 있는 이 몸은,
누구의 것?
"레이무!"
입술에, 볼에, 부드러운 것이 와닿았다. 눈 앞을 온통 보라빛으로 물들이는 드레스 자락. 순식간에 가득 폐에 들어차는 익숙한 향기에, 일순 발작이 가라앉는다.
"...유..."
쿠웅. 묵직한 돌에 다시 눌리는 감각이 의식을 새까맣게 지워나간다. 손 끝에 닿는 천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이어지는 것은 이름.
단지 몸에서 몸으로,
죽으면 다시 다음으로,
그렇게하여 하쿠레이는 계속하여 축적 되어가고.
그렇다면 이 몸은,
그저 하쿠레이의 기억을 기록하는 데에 쓰이는 일회용의 부속일 뿐인가.
"아아아아아!!!!!!!!"
"레이무!!"
숲이 높아지고, 하늘이 떨어진다. 유카리의 몸과 함께 쓰러진 레이무의 몸은, 그 어느 날에 보았던 것보다도 갸날프다. 그것은 손에 잡히는 실체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레이무의 존재감이 터무니없이 엷었다. 이런 수에 당할만큼 바보같지 않은 아이라고 믿고있었는데. 아니, 믿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솔직히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아이는 단지, 이제 막 열댓살을 먹었을 뿐인 인간 꼬마라는 것을.
"레이무!!!"
유카리는 강하게 레이무를 끌어당겼다. 레이무의 손 끝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손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지만,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엄청난 악력으로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면서 유카리는 그녀를 떼어내어 눈을 맞추었다. 희뿌옇게 흐려진 초점을 억지로 자신에게 끌어들이면서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이 정신나간 무녀가...! 얼른 나를 보라고!!"
"하아! 크윽, 뭐라는...!"
효과는 있다. 심하게 떨리고 고양된 어조라고 할지라도, 어찌되었든 평소같이 비꼬인 말투에 레이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그 실낱을 놓치지 않고 유카리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턱을 붙들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자꾸 무너져내리는 몸을 한 손으로 잡아 받치면서 수많은 혼돈에 뒤섞여 있는 레이무를 찾았다.
"진짜 바보네! 일전에 남의 집까지 쳐들어와서 행패부릴 때는 언제고. 왜 쟤한텐 그렇게 약한데? 그렇게 저 여자애가 좋니?!"
"크, 우윽! 하아아앗!!"
쿨럭, 입에서 한웅큼 터져나오는 액체. 옅은 핏물이 섞여 있을 뿐, 사람의 몸에서라면 보통은 나와서는 안될 무언가들이 튀어나와 유카리의 옷을 짙은 보라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삼킨 빛의 입자는 나오지 않는다. 레이무는 더욱 더 세게 그녀의 옷을 붙잡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단지 괴로워서만은 아닐 것이라고, 유카리는 생각했다.
"유...카리...!"
"그래. 여기있어. 이제 좀 깨어나!"
"나는..."
목이 메어 꼴사나운 목소리로,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레이무는 유카리에게 매달린다.
필사가 되어,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나는, 없어...?"
"..."
"있는 것은... 앞 서서 존재하는 것은... 하쿠레이."
"..."
"사라져도... 다시 나타나...?"
"─────그럴리가 없잖아."
찰싹, 가볍게 볼을 때린다.
"!!"
그 작은 소리가 레이무의 비명을 누르고, 크고 높은 숲 안에 가득 들어찼다. 순식간에 찾아오는 정적을 놓치지 않는다. 당연하다. 유카리는 필사를 다한다. 그렇게해서라도, 이 아이를 붙잡고 싶으니까.
"이렇게 큰 이변이 일어났는데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늦장을 부린 것도 당신."
레이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걸고 잡아당기면서 유카리가 속삭였다.
"흐르는데로 흘러서, 어느새 모두에게 둘러싸인 것도 당신."
목소리 하나하나에 가득, 담긴 것은 따스함과─ 알아차리기 힘든 애정.
"엉터리의 약속을 일부러지켜가면서까지 마리사를 만나 흠씬 두들겨 팬 것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레이무에게로 빨려들어간다.
"시간을 다한 사쿠야를 보고 화를 내면서 앞뒤도 보지 않고 달려온 것도,"
유카리는 레이무를 껴안아, 자신의 품 속 깊이 끌어당겼다.
"모두가 레이무. 당신일 뿐."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 환상향에서 '레이무'의 존재는 크다.
당신에게 매료되는 인요는 모두 '레이무'에 이끌린 것.
그것을, 어떻게 하면 당신이 알아줄까.
"...유카리..."
"나는 유카타를 입은 레이무가 좋아."
팔에 감긴 레이무의 머리카락에 볼을 부비면서 유카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녀복을 벗은 레이무는, 그야말로 레이무."
"..."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무녀가 아니라, 나만이 독차지할 수 있는 소녀."
"..."
"그래서 좋아."
후우.
작고 가느다란 호흡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조금 촉촉하고 따뜻한 그 숨결에 유카리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표정을 누그러트리면서 레이무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런가..."
레이무의 잔뜩 쉰 목소리가 꺼질듯이 위태롭게 흘러나왔다. 유카리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것?"
"그래."
큭, 하고 막힌 웃음소리가 났다.
"그건..."
"응."
"다행이네."
"그렇네."
완전히 평온하게 가라앉은 레이무의 호흡을 확인하면서, 유카리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레이무의 몸 안에 손을 직접 침투시켜 꺼낸 빛의 입자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손가락으로 짓뭉개 부수어버렸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아이네."
유카리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레이무를 안은 채로, 마치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안은 채로 유카리가 멍하니 서 있는 소녀의 형상을 한 악령에게로 빨려들 듯이 달려들었다. 이 공간에 유카리가 침입하고, 그 오랜 시간이 지날동안 소녀는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바닥에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그 요괴가 위험하다는 것은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맞추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커─흑!]
소녀의 형상을 한 악령이 다시 움직인 것은, 부드러운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고 난 후였다.
"안녕. 못 본 사이 많이 변했구나."
소녀는 유카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 '행위'는 그녀가 모르는 채로, 타의에 의해 진행되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녀에 의해 조작된 육체가, 영혼이, 전율한다.
그리하여 이 눈 앞의 존재가,
자신에게 존재의의를 줌과 동시에 빼앗아버린 장본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당신...]
"그런 때도 있었지... 재미있어 보인다고 끼어들었던 것에는 지금 약간 후회해."
꾸드득. 실체가 없는 영혼의 목에서 무엇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허상과 실체의 경계를 없앤 유카리의 손이, 소녀의 목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녀의 몸 속, 일찍이 자신이 심심풀이로 갈라놓았던 요괴와 인간의 경계를 녹여 합쳐감과 동시에 소녀의 숨통을 조른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의 단절이나, 혼의 성불의 관념이 아니다.
존재 자체를 지운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분리시켜 이루고 있던 경계를, 없애버린다.
"당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크....으...]
"조금, 화가 나서 봐주는 것은 없을거야."
[....큭.]
유카리의 금안이 서늘하게 빛을 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줄께."
희미해져가는 소녀의 형상을 보면서 그녀가 고한다.
아아, 그런가. 소녀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 끊어지지 않는 생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소녀는 이미 보이지 않는 입술을 비틀면서 투덜거렸다.
[당신. 진짜 싫어.]
"네, 네."
바깥에서나 여기서나 흔히들 겪는, 사춘기 딸을 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카리는 소녀의 존재를 말살했다. 경계가 없어진 존재가 주변에 스며들어가면서, 희미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흥."
유카리의 귀가 나빠진 것일지 몰라도,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처럼만 들렸다.
"뭘 감사하는 거야... 끝까지 바보같은 인간이었네."
지쳤다. 극심하게 몰아쳐오는 피로감을 느끼면서 유카리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는다. 천하의 야쿠모 유카리의 그런 모습은 돈을 주고도 구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뭐─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자신의 품에 안긴 홍백의 무녀를 쓰다듬었다.
"..."
곧 마리사가 오고, 엉망이 되어 쓰러져있는 이 아이를 발견할 것이다. 죽어버린 홍마관의 메이드는 그 어린 군주가 해결해주겠지.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지만, 그래도 좋았다.
"피곤하네."
마리사의 눈에 띄이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자. 유카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에 한껏 힘을 주면서 레이무를 끌어당긴다.
"후우."
그전까지는 조금만 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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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뭐야. 이거. 쓰면서 이렇게 재미없었던 SS는 처음입니다. 이건 부끄러우니까 토호에 올리지 말아야겠네.
창작에서는 그래도 좀 더 플롯을 다듬은 다음에 글에 들어가는 편이지만, SS같은 경우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런지, '이런 장면을 쓰고싶어!!'라는 생각만으로 글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것도 '레이무가 유카리에게 매달려서 절규하는 모습'을 쓰고 싶어! 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글. 쓰면서 점점 내용 꼬이고 이상해져 가드니 모야, 이게...
에효. 됐어.
맨 처음 도입은 육렝 에로 도입부에 쓰려고 작성해두었던 것인데, 적당히 합쳐봤습니다.
음. 이제 렝육에로를 쓸 차례인가. 이거 진짜 어렵네요... 대체 스토리 어떻게 전개해야할지 짐작도 안가요. 골때리네.
# by | 2007/08/24 21:49 | └ fan fiction | 트랙백 | 덧글(6)

:블로그
: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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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렝육 어쩌지... 머리아파요.........
..엄...렝육기대할게요..치즐님 홧튕...
그리고 렝육....엄.... 너무해...ㅠㅠ
상냥하달까 자상하달까 언니같달까 보호자랄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꺄락
그치만 렝육의 유카리가 제일 기대되요....당황하는 부끄러워하는 유카리 감사..(..)